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고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의 지상에서의 환경은 거칠고 험악하였다. 그분의 영광이 가려졌던 것은 외양의 위엄이 주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은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다.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은 결코 영혼을 사망에서 구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어떤 세속적 성질의 매혹물로 사람들을 당신의 편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직 하늘의 진리의 아름다움만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이끌어야 하였다. 메시야의 품성은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 왔으므로, 그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에 기초해서 당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천사들은 영광스러운 구원의 경륜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아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주목하였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땅에 왔다. 다른 민족들은 우화를 취급하고 거짓 신들을 경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예언의 빛이 비쳤던 땅에 천사들이 왔다. 천사들은 예루살렘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찾아갔다. 제사장 사가랴가 제단 앞에서 봉사할 때에 그리스도의 강림이 가깝다고 하는 것이 이미 발표되었다. 이미 선구자가 출생하였고 그의 사명이 이적과 예언으로 입증되었다. 그의 출생에 대한 소식과 그의 사명의 놀라운 의미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들의 구속주를 환영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양을 가리켰지만 거기서까지도 그분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유대나라의 제사장과 교사들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큰 사건이 이제 곧 일어나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무의미한 기도를 외우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예배 의식을 거행하였으나 재물과 세상의 명예를 위하여 다투는 가운데 메시야의 나타나심을 위하여는 준비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무관심이 이스라엘 땅에 편만하였다.
하늘의 사자들은 거룩한 진리의 빛을 세상에 나누어주라는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무관심을 놀라움으로 바라보았다. ………
하나님께서는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사 44:3; 시 112:4)라고 말씀하신다. 빛을 찾고 그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밝은 빛줄기가 비칠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날에도 인류 가족들이 그 노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에 선포한 선언과 그때에 울린 선율(旋律)은 끝 날이 가까이 이를수록 더욱 고조될 것이며 땅 끝까지 반향될 것이다. 의로운 해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면서 떠오를 때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라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은 허다한 무리의 음성에 의하여 이 노래가 다시 울려 퍼질 것이다.
천사들이 사라지자 빛도 희미해지고 베들레헴 언덕은 다시 밤의 어둠에 싸였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일찍이 보지 못한 가장 찬란한 광경이 목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았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거기를 떠나 그들이 보고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오늘날 하늘과 땅은 목자들이 천사들의 노래를 듣던 그때보다 더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옛날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대낮에 천사들을 만나 포도원과 밭에서 이야기하던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권고(眷顧)의 대상이다. 평범한 인생길을 걷는 우리에게도 천국은 매우 가까울 수 있다. 하늘 궁정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오가는 발걸음에 함께 할 것이다.
베들레헴의 이야기는 다함이 없는 주제이다. 그 속에는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롬 11:33)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구유와 바꾸시고, 경배하는 천사들과의 교제를 외양간의 가축과 바꾸신 구주의 희생에 경탄한다. 사람의 자만심과 자부심은 그분의 임재 앞에 견책을 받는다. 49 그러나 이것은 그분의 놀라운 겸비의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위대한 유전의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분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공유하시며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사단은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궁정에서 가지신 그 지위 때문에 미워하였다. 그가 쫓겨났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더욱 미워하였다. 그는 죄에 빠진 인류를 구속하기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사단이 통치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연약함을 가진 무력한 어린 아기로 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인간으로서 누구나 당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싸워야 할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애의 위험들을 생각하고 떤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사단의 권세에서 보호해 주고 시험과 투쟁에서 벗어나도록 붙잡아 주길 원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 더욱 심한 투쟁과 더욱 무서운 위기를 당하게 하신 것은 우리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인생의 길이 안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은 여기 있”다. 기이하도다, 하늘이여! 놀랍도다, 땅이여!